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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드에서 크립토 여제로... 디지털 금융 플랫폼을 꿈꾸다

피델리티, 아비게일, 존슨

[ Next Battlefield: Digital Assets ] 2008년 2월 어느 날, 미국 뉴욕 JFK공항. 그날을 떠올리면 코끝이 시릴 정도의 한기가 느껴진다. 미국, 그것도 금융의 심장부인 뉴욕에 첫 발을 디뎠다. 교환학생 프로그램 이수를 위해 방문한 맨해튼은 별천지였다. 월스트리트를 가득 매운 뉴요커들. 심장을 뛰게 했다. 학교 가는 길이 눈에 익을 무렵, 녹색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맨해튼 어디에서건 볼 수 있었다.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Fidelity Investments)’ 간판이다. ‘월가의 영웅’ 피터 린치(Peter Lynch)가 펀드 매니저로 일했던 운용사다. 그가 쓴 『이기는 투자』(Beating The Street)는 필자의 20대를 관통하는 책이다. 진로의 밑그림을 그려준, 그 결과 필자는 국내 최대 자산운용사에서 10년째 일하고 있다. 피델리티는 피터 린치를 배출한 운용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2007년 펀드 열풍에 올라탄 외국계 운용사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2018년 10월 ‘피델리티 디지털 에셋(Fidelity Digital Assets)’이 탄생하기 전까지의 얘기다. 펀드 제국의 여제, 펀드 이후를 생각하다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 중 하나는 여기 모인 블록체인 커뮤니티에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블록체인 기술을 받아들이는 걸 어렵게 만드는 다양한 장애물이 있습니다. 피델리티는 이 장애물을 극복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피델리티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여러분과의 협업이 꼭 필요합니다.” 피델리티의 아비게일 존슨(Abigail Johnson) 회장이 말했다. 그는 2017년 세계 최대 블록체인 콘퍼런스인 ‘컨센시스’ 연단에 올라,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피델리티 전체 그룹이 관리하는 자산이 약 8000조 원이다. ‘공룡’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거대 금융그룹이다. 이런 공룡이 아직은 피라미에 불과한 디지털 자산 시장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공룡이긴 한데, 똑똑하고 민첩하다. 그의 발표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디지털 자산 시장이 열리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비게일 존슨 회장은 피델리티의 창업자 에드워드 C. 존슨 2세(Edward C. Johnson Ⅱ)의 손녀다. 피델리티는 비상장 회사다. 존슨 일가가 경영권을 세습해 오고 있다. 존슨은 피델리티의 지주회사이자 모태인 FMR(Fidelity Management & Research)의 최대주주다. 약 25%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개인 추정 자산은 약 20조가 넘는다. 그는 하버드대 MBA를 마친 후 주식 애널리스트로 피델리티에서 일을 시작했다. 여러 부서를 거친 뒤 2012년 그룹 회장직에 취임했다. 2014년부터는 CEO를 맡고 있다. 사내 전문 잡지인 피델리티 인베스터의 짐 로웰(Jim, Lowell) 편집장은 존슨 일가를 중국에 비유했다. “그들에게는 항상 5년, 10년 계획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Forbes)는 2018년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5위로 그를 꼽았다. 금융 공룡, 그런데 똑똑하고 민첩하다 피델리티는 지난해 약 24조 원의 매출을 올렸다. 임직원은 4만5000명이. 운용자산(AUM)은 약 3000조 원이지만, 전체 그룹이 관리하는 자산(주식약정 및 퇴직연금(401K) 계좌 등 포함) 기준으로는 약 8000조 원이 넘는다. 일본 전체 펀드 시장 규모가 약 2500조 원이다. 그야말로 ‘공룡’이다. 덩치만 큰 것도 아니다. 2017년부터 매년 기술 연구개발(R&D) 비용에 3조 원 이상을 쓴다. 곧,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자사 비즈니스에 접목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연 3조 원을 당장 돈 못 버는 일에 쏟아 붓는다. 이 업무를 주도하는 곳이 ‘피델리티랩(Fidelity Lab)’이다. 2018년 10월 출범한 피델리티 디지털에셋 역시 피델리티랩에서 인큐베이팅한 프로젝트 중 하나다. 혁신의 DNA는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오늘날 모든 PC의 근간이 된 IBM시스템360이 출시된 게 1964년이다. 피델리티는 이듬해 바로 이 컴퓨터를 샀다. 1995년에는 운용사 최초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넷스케이프(Netscape)가 브라우저 ‘내비게이터(Navigator)’를 출시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아서다. 다음 도전이 비트코인(Bitcoin)과 블록체인(Blockchain)으로 향한 건 당연한 수순이다. 2014년 2월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초기 단계 리서치에 착수했다. 2015년 들어선 채굴을 전담으로 하는 벤처를 세웠다. 그해 5월엔 블록체인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신설했고, 11월엔 기부금 펀드를 비트코인으로 받기 시작했다. 2016년 6월에는 디지털 자산 사업을 위해 학계 및 산업계와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2017년 8월에는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의 계좌를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 홈페이지와 연동시켰다. 9월엔 앞서 언급한 기부금 펀드의 결제 수단으로 이더리움(Ethereum)을 추가했다. 그리고 2018년 10월, 피델리티 디지털에셋을 설립했다. 수수료 전쟁, 제로를 넘어 마이너스까지 그렇다면, 피델리티는 왜 디지털 자산 시장을 선도하려는 걸까. 먼저, 전통 자산운용업이 과열 경쟁 국면에 돌입했다. 수년 내 경제 활동의 핵심 주체가 될 밀레니얼과 Z세대들은 과도한 학자금 대출에 졸업하는 순간 빚쟁이가 된다. 경기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시장에 무차별적으로 풀려난 돈에 자산가격이 치솟는다. 여기에 과거에는 없던 핀테크 기업들이 잠재 고객층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적시에 선보인다. 전통 자산운용업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수수료를 낮추는 것밖에 없다. 미국 자산운용업계는 이미 수수료 전쟁(Fee War) 중이다. 피델리티는 유리한 고지 선점을 위해 2018년 8월, 무보수 펀드를 출시했다. 주식형 인덱스 펀드 2종이다. 이른바 피델리티 제로(Zero) 시리즈다. 수수료 수입을 포기하고 인덱스 펀드의 주식 대차 수수료만 수익으로 먹겠다는 전략이다. 제로 시리즈는 출시되자마자 큰 성공을 거뒀다. 출시 이후 한 달 만에 1조 원 넘게 팔렸다. 최소 가입금액도 없앴다. 그러자 인덱스 펀드의 절대 강자 뱅가드(Vanguard)가 물량 공세를 펼쳤다. 바로 자사의 38개 인덱스펀드의 보수와 최소 가입금액을 낮췄다. 수수료 전쟁의 끝은 제로가 아니다. 미국의 솔트파이낸셜(Salt Financial)은 네거티브 수수료 펀드(ETF)를 미 SEC(증권거래위원회)에 신청했다. 수수료가 -0.05%다. 고객이 돈을 맡기면 되레 돈을 얹어 줘야 한다. 과거의 영광을 못 잊고 선혈이 낭자한 수수료 전쟁판을 기웃거리다간, 회사의 미래가 사라질 수 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라 운용업의 본질은 수수료 비즈니스다. 전통 자산시장에서 수수료를 받을 수 없다면, 수수료를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피델리티는 그 새로운 시장이 디지털 자산 시장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피델리티 디지털에셋은 기관 투자자들의 암호화폐 수탁 서비스에 그치지 않고 직접 중개업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다양한 암호화폐를 중개하는 과정에서 높은 수수료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증권형 토큰(Security Token) 시장에 대한 관심도 여러 차례 내비쳤다. 피델리티의 궁극적 목표는 증권형 토큰 시장을 개척하고 장기적으로 펀드를 대체할 가능성이 큰 새로운 투자 수단의 표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양한 자산(주식ㆍ채권ㆍ부동산 등)이 토큰화(Tokenization)되고, 여기에 투자할 수 있는 새로운 토큰이 나올 것이다. 필자는 이런 개념의 투자를 ‘투자 토큰(Investment Token)’이라는 이름을 붙여 설명해 왔다. 이런 초창기 모델이 바로 페이스북의 ‘리브라 투자 토큰(Libra Investment Token)’이다. LIT 보유자는 리브라 리저브(선진국 채권 및 주요국 통화 바스켓)에서 나오는 수익을 배당 받는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리브라 리저브를 보유한 펀드라고도 볼 수 있다. 간접 투자를 꼭 펀드를 통해서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전통 자산을 토큰화 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증권형 토큰 및 암호화폐를 투자ㆍ중개ㆍ자문ㆍ수탁하는 과정에서, 피델리티는 새로운 수수료 수입의 원천을 발굴할 것으로 기대한다. 금융 그룹을 넘어 디지털 자산 플랫폼으로 금융상품을 일회성으로 제공하는 단편적인 비즈니스 모델은 수명을 다했다. 금융도 플랫폼화를 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얼마나 많은 고객을 자신들의 플랫폼에 가두느냐(락인 효과)가 향후 금융그룹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 JP모건의 최근 행보를 보면 변하는 현실을 알 수 있다. JP모건은 자신들의 금융 플랫폼을 구축하기 위해 JPM코인을 만들었다. 지금은 JP모건 금융서비스를 이용하는 금융기관들의 결제 수단으로 한정돼 있다. 하지만, 플랫폼 비즈니스의 핵심이 무엇인가. 이용자 수를 늘리는 것이다. 사용 고객층을 두텁게 하기 위해 JPM코인은 반드시 그 용도를 확장할 것이다. 피델리티는 금융회사 중 다양한 파이프라인(사업 분야)을 보유하고 있다. 자산운용, 리테일 브로커리지 서비스, 수탁 서비스, 청산소, 401K 사업자, 의료저축계좌 사업자 등, 명실공히 ‘생활금융’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다. 이런 플랫폼이 창출하는 수익을 극대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체 지불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제 감이 좀 오지 않나. 거대 금융그룹들이 페이스북의 리브라 프로젝트에서 빠진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피델리티 역시 자체 암호화폐 개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비게일 존슨이 디지털 자산 시장을 향해 던진 승부수는 어떤 결과를 나을까. 분명한 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용재 <넥스트 머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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