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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형] 사토시를 영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사토시, 영국

[철학자의 탈중앙화 잡설] 개인적으로 비트코인은 영국인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최초의 비트코인 블록에 영국 일간지 '타임즈런던(The Times of London)'의 2009년 1월 3일 헤드라인 기사 제목이 들어가 있으며, 그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스코드 주석과 포스팅에 등장하는 영국식 영어 표현(grey·colour·bloody hard 등)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비트코인이라는 제품이 가지고 있는 사상 그 자체가 너무나도 영국스럽다. #영국의 신원인증이 느슨해 보이는 까닭 유럽 서쪽 끝의 섬나라 영국에는 주민등록 제도가 없다. 출생·사망·혼인신고 외에는 국가가 국민들이 어디에 사는지 제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진은 물론이거니와 지문도 채취하지 않는다. 출입국 기록도 관리하지 않는다. 적국의 스파이가 공작을 펼치던 1·2차 세계대전 시기를 제외하고는 영국 정부는 국민들의 신분을 주민등록 형태로 추적 및 기록하고 있지 않다. 여권 등을 만들기 위해 신분증명이 필요로 할 때, 그들은 해당 지역에 오랫동안 살고있던 사람에게 서명을 받아온다. 한국으로 치면 주민등록등본을 가까운 주민센터가 아닌 가까운 주민에게 받는 격이다. 영국인이 경계하는 것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국가가 주어진 권한을 남용하여 국민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주민등록제도는 매우 편리하지만, 국가 구성원 개개인의 데이터를 단일 권력기관이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경우 이는 큰 문제가 된다. 결국 사회는 이들을 견제할 수단을 요구하게 되고, 이 견제 수단에 대한 견제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장치들이 권한 남용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영국의 신원인증 절차는 우리에게 공인된 기록(증명)이란 무엇이고, 이러한 기록을 누가 관리해야 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주기적으로 치뤄지는 선거와 다수의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각종 제도들도 권력을 견제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는 내 신원에 대한 증빙이 종종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신원 증명에 대한 권한을 누구 하나에게 몰아주는 것보다는 각 마을에 오래 거주한 유지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느끼는 듯하다. #매 10분마다 선거를 치르는 시스템이 있다? 어떠한 시스템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해당 시스템의 데이터는 매 순간순간을 적절한 자격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생성·수정·삭제할 수 있다. 사전에 정해진 규칙 이외의 방식으로 조작되는 데이터는 다수의 동의를 받을 수 없도록 설계된 시스템이 있다면, 영국인들도 거부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2009년 영국식 영어를 사용하는 익명의 개발자 사토시 나카모토는 금융데이터를 대상으로 데이터의 생성·수정·삭제 권한이 전세계에 분산돼 있는 비트코인을 만들었다. 비트코인 시스템 내에서의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합의 과정은 매우 독특하다. 작업증명(Proof of Work)으로 불리는 이 알고리즘은 매 10분마다 전세계 컴퓨터를 대상으로 투표를 받아 데이터를 만들어낼 사람을 투표한다. 마치 매 10분마다 대선이나 총선을 치르는 것과 같다. 금융데이터를 대상으로 10분마다 세계인이 참여하는 세계 정부가 선출되어 기록을 관리하는 것이다. 이는 화폐금융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인류 역사상 첫 직접 민주주의다. 또한 이 시스템은 매우 정교하다. 지난 11년간 단 1원의 오차도 생긴 역사가 없다. 컴퓨터만 있으면 누구나 이 합의 과정에 참여하는 선거인인 채굴자가 되어 의사결정을 해나간다. 이 시스템의 데이터는 누군가 책임을 지고 관리하거나 감시할 필요가 없다. 데이터의 정합성이라는 특성은 충족되면서 동시에 누군가 일방적으로 남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낮춘 것이다. 그렇기에 비트코인은 탈규제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시스템의 존속을 위해 적절한 규제를 필요조건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비트코인과 같은 공개 블록체인(public blockchain)을 ‘허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체인(permissionless blockchain)’이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트코인은 영국식 분산 정치와 한국의 주민센터를 합친 혁신이다 반면에 일정부분 정해진 참여자의 허가를 필요로 하는 형태의 블록체인(permissioned blockchain)도 있다. 사전에 정해진 선거인들이 주기적으로 데이터 생성·수정·삭제 과정에 참여해서 의사표시를 하고,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방식이다. 허가형 블록체인은 참여자의 합의를 통해 데이터를 만들어 낸다는 측면에서 공개 블록체인과 같지만, 이미 투표를 할 수 있는 자격요건이 블록체인 외부적으로 정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제도와 규제의 영향을 피하기 힘들다. 공개 블록체인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은 '신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문장이다. 권한을 가진 기관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수준을 넘어 다수가 참여하기 때문에 권위있는 기관을 신뢰할 필요가 없는 시스템인 것이다. 비트코인 상에서 기록이 발생하는 계정 대부분은 누구의 소유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어떠한 개인 신상정보도 비트코인 시스템 내에서 계정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사진도 없고, 주소도 없고, 지문도 없고, 이름도 없고, 국적도 없다. 그럼에도 매일 20조원어치에 달하는 비트코인이 높은 신뢰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거래되고 있다. 비트코인은 정치적으로는 권한이 분산된 영국식이면서 동시에 효율성과 편의성은 한국의 주민센터급으로 구축해낸 혁신이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사토시 나카모토의 통찰과 현대 암호학의 기반을 닦은 과학자 및 엔지니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정순형 온더(Onther)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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