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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형] 철학마저 함수로 표현되는 세상

로봇, 인공지능, 함수

[철학자의 탈중앙화 잡설] 보스톤 다이나믹스의 체조하는 로봇의 모습은 놀라움을 넘어서 경외감마저 불러 일으킨다. 이 로봇은 마치 사람처럼 앞구르기·뒷구르기·점프·제자리 회전 등을 한다. 그리고 마치 스포츠 경기의 승자처럼 두 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린다. 생긴 모습만으로는 이 기술을 이해하기 위해 고도의 복잡한 개념을 알아야 될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원리는 매우 단순하다. #함수로 세상 만사를 표현하는 방법 앞서 언급한 기술은 단 한 줄의 수식으로 표현된다. 이후 상태 = F(이전 상태, 명령) —- 식 (1) 이 함수 F는 1)이전 상태와 2)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최종적인 3)이후 상태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팔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동작의 경우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오른쪽에 있는 팔의 좌표 = F(왼쪽에 있는 팔의 좌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명령) 왼쪽에 팔이 위치해 있을 때 로봇에 탑재된 컴퓨터는 1)현재의 팔의 좌표를 구한다. 그리고 이 좌표에 2)변형(transformation)을 가해 3)새로운 팔의 좌표를 구한다. 보스톤 다이나믹스의 로봇은 각 부품(팔ㆍ다리, 몸 등)의 현재 위치에 어떠한 변경을 가해야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지에 관한 정교한 모델 및 강력한 연산 기능이 담겨있다. 엔지니어들은 밤을 지새워가며 수많은 테스트를 거친 뒤, 최적의 값을 도출해 냈을 것이다. 식(1)은 기술적인 영역에만 적용될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생활에 밀접한 문제를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한국 속담인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를 앞선 함수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오는말 = F(상대방, 나의 가는 말) 상대방의 오는 말은 지금 상태방의 상태와 내가 상대방에게 내뱉은 말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다. 대하는 사람의 성향과 상황에 따라 오는 말의 경중이 달라지게 된다. 다만 이러한 관계 함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성으로 인해 모델링하기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많은 현대의 과학자들이 이 둘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들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관련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이 성과는 대부분 현대의 수리통계 기법과 컴퓨터로부터 시작된다. #철학마저도 표현하는 함수 함수의 강력함은 세상 만사를 컴퓨터로 계산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에 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작용-반작용과 관련한 일은 함수관계로 계산할 수 있다. 배가 부르다 = F(배가 고프다, 밥을 먹는다) 잔고가 100만원이다 = F(잔고가 200만원이다, 100만원을 친구에게 송금했다) 숙제를 한 상태 = F(숙제를 하지 않은 상태, 숙제를 풀었다) 화면에 글씨가 출력 = F(화면에 글씨가 출력되지 않음, 키보드를 입력) 라면 = F(냄비, 라면스프, 면, 물, 파, 계란, 열) 슬프다 = F(평온하다, 슬픈 영화를 본다) 인류 최초의 학문인 철학은 고대 희랍어의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 지혜에 대한 사랑)에서 유래됐다. 결국 문명의 발전이란 인간이 경험을 통해 쌓은 사랑스러운 노하우들이 후대에 전달되면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 와서 이러한 노하우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도구 중 하나인 컴퓨터를 통해 모두 계산될 수 있고, 그 기술 중 일부를 우리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고 부르고 있다. 원래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쌓여야 될 노하우가 컴퓨터를 통해 경험하지 않고도 생기는 세상이 온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함수, 블록체인 로봇이 팔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두르는 함수로 돌아가보자. 만약 여러분이 이 로봇을 구매했는데 로봇의 생산자가 실수로(혹은 의도적으로) 사람을 만나면 자동으로 팔을 휘두르는 계산공식을 끼워 넣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인간이 만든 도구가 인간을 해하는 끔찍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물론 현실의 국가는 이러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수많은 안전 장치를 마련해둔다. 생산자가 만들어진 제품에 하자가 있어 소비자가 해를 입었다면, 생산자는 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누군가 문득 이런 아이디어를 낸다. "법과 제도가 개입하지 않아도 만들어진 제품에 적용된 함수(기능)가 높은 신뢰도를 바탕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자와 문제가 태생적으로 생길 수 없는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사람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비트코인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금융분야에 최초로 적용해 비트코인을 만들었다. 비트코인 함수의 본질은 비트코인을 쓰는 사람들의 잔액을 관리해주는 것이다. 원래는 은행의 전산 시스템이 할 일을 블록체인으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비트코인이 만들어낸 탈중앙성이라는 특성은 애초에 잘못된 함수(잔고 변경)가 실행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스템은 비트코인이 지난 12년간 단 한번도 중앙의 개입이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블록체인 장부상 단 1원의 오차도 발생하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이더리움은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간 모델이다. 이더리움은 금융 영역 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분야에서 이러한 함수를 사용자 마음대로 정의할 수 있도록 하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앞서 예를 들었던 '인공지능 로봇이 팔을 휘두르는 함수'를 이더리움을 통해 만들어둔다면,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기능을 가진 로봇은 생겨날 수 없다. 법과 제도가 개입하기 전에 블록체인 내부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특징을 가진 프로그램을 스마트 콘트랙트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스마트 콘트랙트가 만들어 낼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기대감이 지금의 이더리움 시가총액을 받치고 있는 믿음의 근간일 것이다. #도구는 인간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워쇼스키 감독의 영화 <메트릭스> 시리즈는 인공지능에 의해 정복된 디스토피아 인류의 투쟁기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메트릭스의 인공지능은 인간 몰래 스스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인류를 그들의 건전지(에너지원)로 쓴다. 이런 비극적인 서사는 왜 생겨났을까. 인공지능이 사용하는 함수가 인간의 통제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이 상황은 앞서 로봇 엔지니어가 사용자 몰래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함수를 심어놓은 것과 큰 차이는 없다. 다만, 이러한 행위의 주체가 사람이 아닌 로봇 그 자체일 뿐이다. 만약 메트릭스의 로봇이 이더리움 위에서 돌아간다면 어떨까. 인공지능이 진화를 거듭해 나가는 과정은 작업증명(PoW) 혹은 지분증명(PoS)이라고 불리는 합의 과정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채굴자는 당장 발생하는 수수료 수익보다 장기적으로 본인과 인류에게 가하는 해가 더 크다고 판단될 때 해당 기능를 포함시키지 않는 선택을 할 것이다. 이럴 경우 메트릭스 인공지능 로봇은 더 이상의 진화를 멈추고, 영화 메트릭스 이야기는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상상은 아직 현재의 기술 수준에서 봤을 때 말 그대로 공상과학 소설에 가깝다. 블록체인은 불특정 다수의 신뢰를 쌓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성능을 대폭 희생했기 때문이다. 반면 인공지능처럼 고도의 연산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성능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은 블록체인에 인공지능이 구현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러나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이더리움2.0과 필자의 회사를 포함한 수많은 레이어2 블록체인 기술이 내세우는 키워드는 확장성(scalability)이고, 이것 자체가 성능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블록체인 확장성 문제는 인공지능을 포함해 '모든 세상의 문제'를 신뢰할 수 있는 인프라에 올려둘 수 있느냐 없느냐의 쟁점으로 확대될 수 있다. 결국 블록체인은 기술이고, 기술은 도구다. 도구는 인간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블록체인의 확장성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인공지능 로봇청소기가 세상을 정복하는 비극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정순형 온더(Onther)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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