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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형] 비트코인 반감기는 탈중앙 감산합의다

정순형, 원유, 반감기, 감산합의

[철학자의 탈중앙화 잡설] 2020년 4월 20일 세계 최대 규모의 선물시장인 뉴욕상업거래소에서는 매우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텍사스산 원유(WTI) 선물이 -37.63달러를 기록하며 장이 마감된 것이다. 원유를 파는 사람이 사는 사람에게 오히려 4만원 정도의 돈을 얹어줘야 팔 수 있는 상황이 온 셈이다. #원유 폭락의 메커니즘 전세계에서 하루에 생산되는 원유의 양은 약 9000만 배럴 수준이다. 여기서 세계 5대 산유국인 미국·사우디아라비아·러시아·이란·캐나다의 생산량을 합치면 전세계 생산량의 약 절반 정도가 된다. 2020년 1월 발병이 보고되기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덮치면서 원유 수요는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전문가들은 수요 감소만 하루 2000만 배럴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는 전세계 원유 생산량의 20~25%가 소비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와 같다. 시장 가격이 움직이는 원리는 매우 단순하다. 사려고 하는 사람이 많으면 오르고, 팔려고 하는 사람이 많으면 떨어진다. 코로나로 인해 수요가 감소했기 때문에 원유 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산유국들의 원유 수출입도 줄어든다. 수요가 줄어든 상황에서 산유국은 최대한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일종의 담합행위를 한다. 카르텔이라고도 불리는 이 행위는 공급량을 조직적으로 줄여 시장 가격을 높여 수입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전체 생산량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5대 산유국 및 OPEC+의 회원국 모두가 동시에 줄어든 수요 수준인 2000만 배럴 이상 감산을 해서 공급량을 제한해 버린다면, 원유의 가격은 코로나 이전 혹은 그 이상으로 충분히 높아질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합의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모두가 동시에 감산을 사이좋게 합의하면 의도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개별 산유국은 그렇게 하지 않을 유인이 매우 크다. 주변국 모두가 감산할 때, 나만 감산을 안 하면 생산량을 유지한 채로 가격 상승 이득을 홀로 누릴 수 있다. 이는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 상황이다. 모두가 동의하면 절대다수의 최대 이익은 극대화되지만, 개별 참가자의 최대이익을 내는 선택지는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합의는 항상 깨진다. #비트코인 반감기는 탈중앙 감산합의다 이쯤에서 흥미로운 상상을 한번 해보자. 전세계의 모든 산유국이 본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매 4년마다 생산량의 절반을 일괄적으로 줄이는 합의를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여기에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자. “이러한 합의가 지속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합의는 정치ㆍ경제적으로 매우 와해되기 쉬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사실 원유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자원도 이와 비슷한 범지구적 합의를 이뤄낼 수 없다. 그런데 지난 12년간 이러한 감산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고 꾸준히 지킨 자원이 있다. 비트코인이 그 주인공이다. 생산의 절차적 측면에서 비트코인은 원유와 매우 비슷하다. 원유는 시추공을 유전에 꼽는 방식으로 생산되고, 비트코인은 고성능 컴퓨터를 인터넷에 꼽아서 뽑아낸다. 그래서 비트코인을 캐는 사람들을 원유를 뽑아내는 사람들과 똑같이 채굴자(miner)라고 부른다. 다만, 비트코인이 원유와 다른 점은 앞으로 수백년간의 감산 스케줄이 프로그램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를 비트코인의 반감기(halving)라고 라고 부른다. 비트코인 채굴자들은 산유국과는 달리 가격이 급락해 본인들의 수입이 줄어들면 다 같이 모여 감산 논의를 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4년마다 비트코인의 생산량은 정확히 절반으로 줄어드는데다가, 합의를 할 주체가 특정되지 않은 채 전 세계에 너무 넓게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가치가 0이 되지 않는 이유 방금 설명한 개념이 바로 ‘51% 공격’이라는 블록체인 기술 용어의 본질이다. 곧, ①사전에 정해진 규칙은 ②전체 참여자의 절반 이상의 카르텔이 형성되지 않고는 바뀔 수 없다. 더 재미있는 점은 만약 비트코인 생태계에서 어설프게 카르텔을 시도하는 순간 엄청난 금전적 손실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비트코인은 게임의 규칙을 바꿈으로써 죄수의 딜레마 상황을 극복한 것이다. 이 상황을 탈중앙화/중앙화 관점이라 풀면(이 칼럼은 ‘탈중앙화 잡설’이다), 원유 산유국은 단 5개 국가의 수장이 전 세계 생산량의 50%를 점유하고 있으니 매우 중앙 집중화 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비트코인은 그렇지 않다. 원유에 비유하면 200개 국가가 0.5%씩 균일하게 원유를 생산하면서 동시에 전체 국가 절반이 동의하지 않는 한 절대로 해산되지 않는 감산 스케줄에 합의한 동맹을 맺은 것과 비슷하다. 자원의 공급량 관점에서 탈중앙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종종 전문가란 사람들이 나와서 비트코인의 가치가 0으로 수렴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그런데 아쉽게도 비트코인ㆍ이더리움을 비롯해 공급 스케줄이 정해진 탈중앙화된 암호화폐의 자산 가격이 0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반면 주요 산유국 감산 협정 불발이라는 뉴스에 전염병이 번지면서 21세기 문명의 원천 그 자체로 불렸던 원유는 0을 넘어 -37.63달러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얼마 후면 비트코인 탄생 12주년을 알리는 세 번째 반감기가 도래한다. 역사상 세 번째로 진행되는 탈중앙화된 감산협의 결과는 후대에 어떻게 기록될까. 지켜볼 일이다. 정순형 온더(Onther)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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